내가 AI 그림을 멀리하게 된 이유
서론
다른 이야기를 합시다
이 분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글의 제목을 보자마자 한 가지 주장이 떠올랐을 것이다.
"무단 수집된 학습 데이터로 인한 생성 결과물의 저작권 침해 여부".
AI 그림을 비판한다고 하면 가장 흔히 떠오르는 쟁점인데, 개인적으로 여기에 대해서는 양쪽의 주장이 모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 일부 모델의 학습 데이터가 그림 저작권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무단 수집된 것은 사실이다.
- 그림 생성 단계에서 AI 모델이 이러한 학습 데이터를 직접적으로 참고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보니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소모적인 싸움을 할 일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어차피 나는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으니, 이 글에서 이 주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 예시로 드는 AI 그림 모델은 모두 저작권자의 승낙을 받고 윤리적으로 수집된 데이터셋으로 훈련된 모델임을 가정하고 있음을 알고 읽어주시면 좋겠다.
도깨비 방망이의 뒷면
AI 분야에 전반적으로 관심이 있다 보니, 나도 여태껏 여러 종류의 그림 AI들을 사용해봤다.
"충분한" 퀄리티의 그림이 약간의 타이핑과 클릭만으로 출력되듯 뽑아낼 수 있는 이 기술이, 처음에는 단순히 신기하고 재밌는 무언가를 넘어서,
분명 어딘가에 쓸모가 있을, 잠재력 있는, 문명의 발전에 약간이나마 이바지할 수 있을 기술이라고, 나는 한 때 생각했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나에게 그림 AI는 어떤 면에선 위협적인, 가급적이면 멀리해야 할 기술로 보이고 있다.
물론 이 기술을 긍정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케이스도 분명히 어딘가에 있겠지만,
적어도 이 기술이 이끌어가고 있는 씬의 전체적인 방향성은 내게는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이고 있다.
내가 그림 AI를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 변기도 예술이니까.
- 싸가지가 없으니까.
변기도 예술이니까
면책조항: 제가 미술이나 인문학이랑은 연이 없는 컴돌이라 헛소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반박 시 님 말이 맞습니다.
6달러만 내면 누구든 전시 가능
<샘>은 가장 흔히 알려진 현대 미술 작품 중 하나다.
일설에 따르면, 미국 독립작가협회가 뉴욕에서 여는 현대 미술 전시회에 마르셀 뒤샹은 원래 <튤립 히스토리아 코디네이팅>이라는 작품을 출품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튤립 히스토리아 코디네이팅> 대신 주변의 철공소에서 적당한 소변기를 구입한 뒤, 옆면에 R. Mutt 1917
이라는 서명만을 추가해 이를 작품으로 제출했다.
마르셀 뒤샹의 이름이 아닌 Mutt이라는 가명 하에 제출된 <샘>은 이를 본 미국 독립작가협회 회원들 사이에서 이것을 미술 작품으로 볼 것인지에 대하여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6달러만 내면 누구든 전시 가능"하다던 전시회에 결국 <샘>이 전시되지 못하자, 마르셀 뒤샹은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협회를 탈퇴하고 <튤립 히스토리아 코디네이팅>의 전시 계획을 취소했다고 한다.
애초에 <튤립 히스토리아 코디네이팅>이라는 작품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도 하더라마는.
이후 다다이즘 잡지 <The Blind Man>에 투고된 <샘>을 옹호하는 글이 유명세를 타면서, <샘>은 지금의 널리 알려진 현대 미술 작품으로서의 위상을 얻게 되었다.
중요한 건 메시지지
특히 유머로서 소모되는 면에서, 요즘 사람들에게 현대 미술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개념 미술의 작품은 그 외형이 너무나도 추상적인 탓에 종종 "저런 건 나도 한다"는 우스갯소리의 대상이 되곤 한다.
다만 이러한 추상적인 개체가 작품으로서 인정받는 이유는, 그 개체 자체보다도 그 개체가 내포하고 있는 컨텍스트에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샘> 작품 그 자체는 그저 주변 철공소에서 적당히 집어온 소변기에 불과하지만, <샘>의 인정받는 진짜 가치는 그 소변기를 미술 작품으로 전시회에 제출하려 한 생각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만약 2025년에 누군가가 대뜸 철물점에서 소변기를 사와서 자신의 미술 작품이랍시고 공개하더라도, 그것이 <샘>의 오마주 이상의 무언가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샘>에는 유의미한 의의가 담겨있었지만,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소변기에는 그러한 의의가 없으니까.
작은 예술가들의 시대
한 때, 현실의 모습을 캔버스 위에 가장 정확하게 담아내는 사실주의가 미술의 정점이라고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혹자는 이러한 사실주의 미술이 "카메라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주장했다.
카메라는 필름 위에 현실의 모습을 분자 단위로 정밀하게 담아낼 수 있으니, 현실의 모습을 담아내는 미술은 이제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는 관점이었다.
하지만 카메라가 발명된 지 200년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풍경을 담고 싶으면 그냥 카메라로 풍경 사진을 찍으면 되는데, 이 사람들은 왜 굳이 사실적인 그림을 손으로 그리고 있는 것일까?
요즘은 다양한 그림 도구에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미술 활동을 즐기고 있다.
이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위대한 예술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 실력이 성장한다는 성취감과,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즐거움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번엔 멋진 그림을 그렸다고 뿌듯해하고, 자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
이들에게는 완성된 그림보다도 그림을 그리는 여정 그 자체가 그림을 그리는 의의가 되고, 이런 사람들의 그림에는 오랜 시간 사랑으로 쌓아올려진 저마다의 내러티브가 자연스레 묻어날 수밖에 없다.
숙련된 아티스트의 그림에는, 그 누가 작정하고 따라하려 해도 완벽하게 따라할 수는 없는, 오직 그 사람만이 소화해낼 수 있는 어떤 "느낌"이 생긴다.
우리가 사는 작은 예술가들의 시대에는, 그 느낌들이, 그 내러티브가, 모든 그림들의 본질적인 특별함이 된다.
나는 이 특별함이, 아티스트의 역사와 사랑에서 묻어나오는 특색이, 그 어떤 AI 그림에도 담길 수 없는 AI 그림의 근본적 결핍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근본적 결핍으로 인해, 나는 AI 그림에 표면적인 픽셀 덩어리 이상의 의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의의를 부여할 부분이 없으니까.
모든 픽셀이 특별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림에 그런 특별함이 결핍되어 있다고 해서, 존재할 가치가 없는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술 작품으로서의 그림이 아닌, 그냥 기능적인 용도의 그림에 특별함이 모자란 것은 딱히 나쁜 건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림 AI를 이렇게 쓰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다고 본다.
- 최종 애셋이 완성되기 전까지 빈 자리에 넣어둘 임시 애셋의 생성
- 방송/영상의 필러/어트랙트, 글의 참고자료/삽화 등 생성
- 브레인스토밍 애셋 등 시각적 정보의 보존/전달
- 아이콘, 심볼, 이모지 등 의미 전달을 위한 기호의 생성
이런 "기능적인" 그림에는 물론 아티스트의 인간적인 터치가 들어가면 더 좋겠지만, 그런 게 굳이 없어도 목적에 맞게 사용되는 데 지장은 없으니까1.
그런데…
싸가지가 없으니까
모든 기술이 다 그렇듯이, 항상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더라.
스타일 카피의 문제
그림 AI가 처음 한창 떠오를 때 쯤, 몇몇 아티스트들이 그림 AI의 개발사들에 소송을 건 일이 있었다.
해당 그림 AI 모델에게 in style of ...
같은 식으로 프롬프트를 던져주면 그 아티스트의 그림 "스타일"을 똑같이 따라한 그림을 그려줬는데,
이것이 해당 아티스트들의 그림이 학습에 사용되었다는 증거이며, 해당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그림을 AI 학습에 사용하는 것을 허용한 적이 없으니, 이는 저작권을 위반한 무단 사용이라는 취지의, 소송의 내용 자체는 맨 처음 이야기한 저작권 문제에 관한 소송이었다.
하지만 이 소송은 아티스트들이 "그림의 저작권을 행사하려고" 건 것도 아니고, 그림 AI에 "두려움을 느껴서", "직장을 잃을까봐" 건 것도 아니다.
그림 AI가 자신의 "스타일"을 따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부분의 아티스트들은 가장 먼저 "기분 나쁘다"는 반응을 보였다.
프로 아티스트란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그림을 자신의 직업으로 삼고, 매일매일을 가장 멋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한테 "클릭 한 번으로 마치 네가 그린 것같은 그림을 아무나 뽑아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의 스타일 뿐만 아니라 그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 그가 쏟은 시간과 노력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고,
거기에 더해 누군가가 그렇게 "뽑아낸"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나도 누구누구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마치 아티스트가 쏟은 평생의 노력을 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같은 스타일의 그림이 나온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누군가가 다다른 어떤 "경지"를 무시하고 끌어내리려는 그 사용법이 분노를 사는 것이다.
자신의 스타일로 누군가의 스타일을 모사하는 것과, 누군가의 그림을 대고 따라 그리는 트레이싱이 커뮤니티에서 완전히 다른 취급을 받는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어지는 비루한 기싸움
현실적으로, 추상적인 현대 미술의 뒷이야기와 이를 이해하는 방식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이러한 관점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우리라 본다.
그림 AI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러한 관점을 이해하고 기술의 사용에 조심을 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점은 아마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 기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토론장이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요즘은 "AI 그림에 대한 반발"에 대한 반발로, AI 그림이 금지된 커뮤니티에 AI 그림을 아닌 척하며 올리거나, AI 그림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그림을 일부러 긁어모아 그 사람의 스타일을 흉내내는 모델을 만들어내는 등, 개인적으로는 치졸한 뒤끝 자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반발심리를 뽐내는 사람들이 제법 보이더라.
도대체 어떤 점이 기분 나빠서 저만큼 악에 받치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라더라, 열 길 물 속은 여름에도 춥다고들 그러지 않던가.
그림 AI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저런 사람들을 보며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게 그림 AI를 멀리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어버린 것 같다.
결론
결국 연구실에서 태어난 모든 기술은 언젠가는 연구실 밖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다.
기술을 만든 사람들이 기술이 어떻게 활용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만드는 경우는 잘 없다. 이에 죄책감을 느끼는 발명가도 있었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발명가도 있었다.
하지만 기술이 충분히 보편화되고 나면, 이러한 상태가 뉴노말이 되는 것은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어떤 사람도, 어떤 사회도 막을 수 없었다.
발전인지 퇴보인지는 몰라도 인류 문명은 새로운 기술로 어딘가에 한 발을 딛었고, 이제 발자국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다음 발자국을 어디에 찍을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기술 발전의 큰 그림에 실질적인 보탬이 되는 (마음에 안 들지만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나도 '이 기술은 별로다'라고 글을 쓰고 있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이 기술을 금지시키자거나 법으로 틀어막자거나 하는 의견에는 반대할 것이다.
그저 더 많은 토의와 생각,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목소리가 더욱 더 많이 쏟아졌으면 좋겠다.
특히나 이런 신생 기술에 대해서는, 첫 스텝이 꼬여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믿으니까…
주석
-
아티스트의 고용 감소나 디자인의 무단 사용(회사 애셋의 아트스타일을 정의한 아티스트를 해고하고 그 스타일을 학습한 AI로 대체한다던가) 등과 같은 다른 문제들이 달려있긴 하지만, 그건 AI보다는 자본주의 쪽의 문제라고 보는 편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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